|
|
|
작성일 : 14-05-29 11:07
글쓴이 :
담임
조회 : 1,289
|
노래는 그냥 노래로 부르면 되는데 어떤 노래는 부르다 보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쉬이 피곤해진다. 내게 스승의 노래가 꼭 그런 노래이다. 이전 섬기던 교회에서 제자반 사역반 집사님들이 일어서서 스승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때 내 느낌은 감동이라기보다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민망함 그 자체였다. 스승의 노래를 듣는 입장에서도 민망하지만 간혹 부를 때도 어색한 느낌이 있을 때가 있다. 스승의 노래는 초등학교 때 부르면 딱 좋은데 어른이 되어 스승의 노래를 부를 때가 있는데 뭔가 어색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스승의 노래에 나오는 너무 거창한 표현들 때문인 듯하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고마워라 스승의 은혜,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사랑’. 요즘 이런 스승이 있을까? 마음에서 은혜를 보답하고 싶은 감동이 밀려오게 하는 그런 감동을 가진 스승과 제자가 있을까? 전혀 없다고 말하면 세상이 너무 슬퍼지겠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지는 않은 듯하다.
누군가를 존경하란 참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존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첫째, 인품이 자신보다 앞서야 하고 둘째, 가르칠 수 있는 학식이 앞서야 하며 마지막으로 나이가 많아야 한다. 간혹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게도 존경한다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나이 차이는 존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여기에다 한 가지가 더 포함된다고 본다. 그것은 그 사람과 내가 서 있는 거리이다. 존경하려면 멀리 있어야 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란 참 힘들고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때마다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들기도 하다. 예전에 어떤 분이 ‘장군의 부하’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내용은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의 가장 가까이 있는 부하는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왜 그럴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갖는 존경은 진정한 존경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의 존경인지 모른다. 멀리 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기 보다는 약간의 사실에 자신이 가진 이미지, 혹은 여론이 만든 환상을 존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는 완벽하길 바라고 우리의 스승은 완벽하길 바란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해 주길 바라고 내가 원하는 그 이상의 자리에 그분들이 서 있기를 원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과 현실에 차이를 느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실망하게 된다.
스승의 노래는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불편하게 한다. 그 노래를 듣는 입장이 되어도 불편하고 불러 줄때도 불편하다. 차라리 축복송이면 서로 편하고 좋을 텐데 왜 스승의 노래를 불러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결론은 이렇다. 스승의 노래를 들어도 부끄럽지 않고 스승의 노래를 불러 드려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을 만들어가고 싶다. 하늘같지는 않더라도, 우러러 볼 정도는 아니어도, 감동이 밀려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노래가 부끄럽지는 않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예수님은 목자와 삯군을 말씀하셨다.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며 삯군은 대가를 받고 받은 삯만큼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받은 삯만큼도 일하지 못하는 소위 삯군보다 못한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스승의 노래는 여러 가지로 나를 불편케 한다. 그리고 스승의 노래는 나를 여러 모양으로 돌아보게 한다.
|
|
|
|